박쥐의 영화 이야기

<블랙 팬서> - 세상과 동떨어진 환상의 흑인 국가가, 세상으로 나오다 본문

영화 감상 이야기/MCU 이야기

<블랙 팬서> - 세상과 동떨어진 환상의 흑인 국가가, 세상으로 나오다

오늘의박쥐 2019. 5. 30. 21:32

흑인이 멋지게 나오는 영화는 많았습니다. 하지만 '흑인들'이 멋지게 나오는 영화는 <블랙 팬서>가 최초일 겁니다. 흑인 개인이 근사한 캐릭터로서 헐리우드에 데뷔하는 일은 이제 드문 일도 아닙니다. 하지만 '흑인'이 인종으로서, 집단으로서, 국가로서 등장할 때는 그런 적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언제나 사회적 약자 집단으로만 묘사되었습니다. 흑인들은 자신들을 다룬 영화를 보면서 차별받는 피해자 의식은 느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자신들에게 우월감을 안겨주는 영화는 볼 수 없었습니다. 흑인이란 언제나 '조연'이거나 '피해자'였습니다. 세상의 주역이 될 수 없었습니다.

<블랙 팬서>는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나라를 흑인 국가로 설정합니다. 백인 국가들 이상으로 부와 기술을 지닌 나라, 하지만 검은 피부의 인간들이 검은 피부에 어울리는 의상을 입고, 흑인들의 세상에서 유래한 문화를 지닌 나라. '와칸다'는 '만약 흑인들이 먼저 과학 혁명을 일으켰다면 어땠을까?'라는 질문에 답을 한 것 같은 나라입니다.

물론 현실에는 이런 나라가 없습니다. 와칸다는 <토르> 시리즈의 아스가르드와 마찬가지로 공상 속의 세계입니다. 그러나 아스가르드와 달리, <블랙 팬서>는 와칸다를 현실의 지구 세계에 편입시키려고 합니다. 관객들로 하여금 와칸다를 공상으로 끝내지 않고, 자신들이 사는 현실과 같은 문제로 생각하게 해줍니다. 바로 현실의 흑인 문제와 연결시키는 방법으로 말입니다.

이를 위해 '에릭 킬몽거'가 등장합니다. 킬몽거는 와칸다인이지만 바깥에서 자랐습니다. 흑인이 그저 흑인이란 이유로 차별받는 것을 봤습니다. 바깥 세상에서 흑인은 약자입니다. 그러나 와칸다에서는 흑인이 강자입니다. 그러나 와칸다는 킬몽거를, 바깥에 있는 흑인들을 돕지 않습니다. 와칸다는 자기들만 지키기 때문입니다. 킬몽거는 흑인을 차별하는 세상을 증오하며, 흑인을 돕지 않는 와칸다를 증오합니다.

블랙 팬서는 킬몽거의 증오를 이해합니다. 하지만 그는 흑인이기 이전에 와칸다의 왕이었습니다. 그는 왕으로서 전쟁을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두 사람의 이념 갈등은 과거의 원한과 얽혀 극한으로 치닫고, 목숨을 건 내전으로 이어집니다. 블랙 팬서는 결국 킬몽거를 저지합니다. 하지만 그의 의견도 수용하기로 합니다. 그는 와칸다의 왕이면서 동시에 세계 시민의 일원임을 받아들입니다. 흑인이 차별받는 세상 말입니다. 그는 와칸다의 평화도 지키면서 세계의 문제도 같이 해결하기로 합니다.

<블랙 팬서>는 MCU 최초로 아카데미상을 수상했습니다. 미술상, 음악상, 의상상입니다. 조금 운이 좋아서 받은 면도 있긴 합니다만, 그만큼 미술과 음악이 <블랙 팬서>를 성립시키는데 큰 공헌을 했습니다. '흑인 문화를 지닌 최첨단 과학 도시'라는 발상을 관객들의 눈과 귀에 전하는 역할 말입니다. <블랙 팬서>는 전반부에서 그런 독특한 환상의 세계를 구현한 뒤, 후반에는 킬몽거와 블랙 팬서의 이념 대립을 통해서 현실로 연결시킵니다. 와칸다라는 국가가 어째서 지금까지 세상에 드러나지 않았고, 왜 지금부터는 드러나는지를 설명하는 것과 동시에 말입니다.

<블랙 팬서>는 미국에서 <어벤져스> 시리즈를 넘고 역대 최고 흥행을 달성했습니다. 흑인 문제를 언제나 껴안고 사는 미국에서는 <블랙 팬서>의 주제가 남다르게 다가왔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다른 나라에서는 그만큼 실감나게 주제를 받아들이기 힘듭니다. 영화의 설정을 현실의 문제에 연관시켜 깊은 주제의식을 이끌어냈지만, 정작 영화 속에서는 '현실의 흑인 문제'가 하나도 묘사되지 않습니다. 초반에 스치듯이 인신매매단이 나오는 것이 전부입니다. 이래서야 흑인 문제와 큰 연관이 없는 나라에서는 영화를 미국인들 만큼 현실성 있게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스토리에 아무 필요없는 시가전 넣을 시간에 이쪽을 묘사했다면, 훨씬 많은 사람들에게 가깝게 다가오는 영화가 되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