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쥐의 영화 이야기

<127시간> - 연출의 힘 본문

영화 감상 이야기/21세기 영화 이야기

<127시간> - 연출의 힘

오늘의박쥐 2018. 12. 21. 20:32



넷플릭스에서 영화 <127시간>을 봤습니다. 캐년에서 등반 중에 팔이 끼이는 사고를 당한 청년이 127시간 동안 사투 끝에 빠져나오는 이야기입니다. 2003년에 '애런 랄스턴'이란 청년이 겪은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었습니다.


127시간. 암벽 틈새에서 팔이 끼인 청년은 황량한 사막 한가운데서 고립됩니다. 주위에 보이는 생물은 하늘을 날아다니는 까마귀와 바닥을 기어다니는 개미 뿐. 그 기나긴 외로운 127시간을 94분으로 축약해서 만든 영화입니다.


대부분의 시간 동안 등장인물은 애런 한 명밖에 안 나옵니다. 팔이 끼어서 꼼짝도 못하므로 상황이 거의 바뀌지도 않습니다. 상영 시간이 94분밖에 안 되는 것을 감안해도 지루해지기 십상인 영화입니다. 하지만 감독이 재주를 한껏 부린 덕분에 영화는 지루하지 않습니다. 영화는 애런이 겪은 일을 구구절절 설명하는데 시간을 낭비하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심리를 묘사하는데 초점을 맞춥니다.


처음 이틀 정도는 카메라에 자기 유언을 녹화하면서 장난도 치고, 차분하게 도구를 만들어보는 등 멀쩡한 정신을 갖추고 있었어요.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애런은 쇠약해지고, 초조해집니다. 물병을 쏟아서 물을 엎지르는 실수도 하지요. 처음에는 바위를 깎아서 팔을 빼 보려고 하다가, 나중에는 팔을 자르려는 시도를 하는 등, 점차 과격해지고요. 그리고 혼자 있는 시간이 계속 되면서 과거를 끊임없이 돌아보게 되고, 나중에는 꿈과 현실을 착각하게 됩니다. 갑자기 폭우가 내려서 자신이 떠내려가고 있다고 착각까지 하지요.


진부한 전개이긴 하지만, 애런은 죽음의 위기에 처하고 나서야 자신이 지금까지 낭비해온 시간들, 함부로 대했던 가족과 친구들을 그리워하게 됩니다. 그리고 마침내 의지로 팔을 끊어내고는 한 팔로 암벽을 내려와서 여행객들에게 구조되고요.


극한상황에 몰린 인간의 살기 위한 의지. 시간의 흐름에 따라 피폐해지는 정신. 그 끝의 깨달음.


평범한 이야기지만, 실화를 바탕으로 한 사실적인 묘사와 현실과 망상을 구분하기 힘든 연출의 힘으로 장식한, 실험 정신으로 충만한 영화입니다. 극한 상황을 좋아하시는 분들이나, 영상 연출에 관심이 많은 분들에게 추천드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