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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들의 침묵> - 공간과 소품, 행동 하나하나에서 전해지는 인물상을 추적하다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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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들의 침묵> - 공간과 소품, 행동 하나하나에서 전해지는 인물상을 추적하다

오늘의박쥐 2019. 7. 12. 18:55

여자를 죽이고 피부를 벗기는 연쇄살인마 '버팔로 빌'을 잡기 위해, FBI 수련생 클라리스 스털링은 정신병원에 수감된 연쇄살인마 '한니발 렉터'의 도움을 받기로 합니다. 유리벽으로 만들어진 감방에 수용된 렉터 박사는 절대로 가까이 가서도, 함부로 대화를 나눠서도 안 되는 존재라고 합니다. 그러나 너무나도 범죄에 대해 잘 아는 인물이라서 클라리스는 위험을 무릅쓰고 렉터의 도움을 받기로 합니다.

<양들의 침묵>에서 가장 돋보이는 것은 공간과 소품을 이용한 캐릭터 표현입니다. 그 유명한 '한니발 렉터'는 영화 안에 16분밖에 출연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렉터는 등장하는 장면 하나하나마다 강렬한 존재감을 남깁니다. 그것은 앤소니 홉킨스의 신들린 연기의 공도 크지만, 무엇보다도 렉터가 갇혀 있는 '공간'이 렉터의 캐릭터를 잘 설명해주기 때문입니다.

겉보기에는 전혀 위험해 보이지 않는 신사적인 중년이지만, 그는 감옥의 가장 깊숙한 곳에서도 특별하게 만들어진 감옥에 수감되어 있습니다. 그를 만나기도 전에 모든 사람들이 편집증적일 정도의 주의사항을 늘어놓습니다. 유리벽에 가까이 가지 마라, 물품은 음식 반입구로 넣어라, 펜을 주지 마라, 렉터의 질문에 대답하지 마라. 그가 받는 특별 대우들은 렉터가 다른 범죄자들과 격이 다르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정작 감옥에 있는 것은 책과 그림들 뿐입니다. 무척 교양적인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렉터는 등장하자마자 한 마디로 정의할 수 없는 입체적인 캐릭터를 보여줍니다.

언뜻 보면 무차별적인 범죄로 보이는 빌의 살인은, 그 자체에 여러 의미가 숨어있었습니다. 피부를 벗기는 것도, 여자만 노리는 것도, 시체 안에 무언가를 넣는 것도 전부 빌의 욕망이 표현된 것입니다. 이런 작은 단서들을 모아 렉터는 얼굴도 모르는 빌이라는 남자의 인물상을 추리해냅니다. 퍼즐 조각 몇 개만 보고 전체 모습을 그려내듯이 말입니다.

이런 식으로 수사에 협력하지만, 렉터는 클라리스를 일방적으로 돕지는 않습니다. 클라리스에게 무언가를 받는 만큼 자신도 무언가를 주려고 합니다. 그래서 클라리스는 렉터와 대화를 나누면서 수사관과 범죄자라는 신분 차이에도 불구하고 일종의 신뢰 관계를 형성합니다. 그런데 어색하지 않습니다. 렉터는 미치광이지만, 그의 광기에는 엄연한 규칙이 있습니다. 그 점은 어떤 의미에서 평범한 사람보다도 대하기 편한 느낌을 줍니다.

인간의 행동에는 무언가 동기가 있습니다. 제목인 '양들의 침묵'도 주인공 클라리스가 수사관이 된 행동 동기를 뜻하는 표현입니다. <양들의 침묵>은 이렇게 인물들의 숨겨진 욕망이 어떤 식으로 표출되는 지를 시각적으로 풀어낸 영화입니다. 그런 개성적인 인간상은 치밀한 미장센에 힘입어 '한니발 렉터'라는 영화사에 길이 남을 캐릭터를 만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