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쥐의 영화 이야기

<다크 나이트> - 반드시 정의가 이기지는 못하는 세상에서, 반드시 정의에 승리를 가져다주기 위해, '어둠의 기사'는 존재한다 본문

영화 감상 이야기/크리스토퍼 놀란 시리즈 이야기

<다크 나이트> - 반드시 정의가 이기지는 못하는 세상에서, 반드시 정의에 승리를 가져다주기 위해, '어둠의 기사'는 존재한다

오늘의박쥐 2019. 6. 2. 14:57

<배트맨 비긴즈>에서 고담의 영웅이 된 배트맨은 제임스 고든 경감과 하비 덴트 검사와 손을 잡고 본격적으로 고담 시의 개혁에 박차를 가합니다. 시장과 판사까지 배트맨의 계획에 협조적이 되자 고담 시의 마피아들은 위축되고 맙니다. 일사천리로 진행되던 계획을 미치광이 악당 '조커'가 가로막습니다.

조커는 강하지 않습니다. 나이프 쓰는 솜씨 빼고는 특별한 재주가 없습니다. 세력도 없습니다. 조무래기 몇 명과 사냥개들이 전부입니다. 정면승부로는 배트맨에게 상대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조커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조커는 배트맨의 약점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이들이 배트맨의 힘과 장비, 신출귀몰한 솜씨 같은 개인적인 면에 주력하고 있을 때, 조커는 배트맨의 진정한 힘의 원천을 꿰뚫어 봅니다. 배트맨의 계획은 사회 인사들과 협력하여 고담 시를 개혁하는 겁니다. 그것을 해낼 수 있는 두뇌와 추진력이 배트맨의 진짜 힘입니다. 조커는 그 힘을 배트맨에게서 빼앗기로 합니다. 그는 배트맨이 아니라 사회를 공격합니다. 배트맨과 협력하는 사람들을 차례차례 죽여 나갑니다. 그리고 배트맨과 협력을 끊지 않으면 더욱더 많은 사람이 죽을 거라고 협박합니다. 이렇게 그는 배트맨에게 칼 하나 대지 않고 그를 궁지로 몰아넣습니다.

이 영화는 영웅과 악당이 총칼들고 죽자살자 싸우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히려 사회 정치 드라마에 가깝습니다. 배트맨은 사회를 개혁하려고 하고, 조커는 타락시키려고 합니다. 둘은 몸이 아니라 머리로 대결합니다. 이것은 고담 시라는 체스판에서 사람들의 마음을 체스말로 이용하는 조커와 배트맨의 두뇌 싸움입니다.

배트맨과 조커는 선악의 양극단에 서 있습니다. 배트맨은 목숨을 걸고 선을 행하려고 하고, 조커는 목숨을 신경쓰지 않고 악을 행합다. 배트맨은 고담 시를 개혁하려고 하지만, 목숨을 위협받아도 악행을 멈추지 않는 조커는 갱생이 불가능합니다. 반면 조커 역시 목숨이 위험해도 악행을 저지르지 않는 배트맨을 타락시킬 수 없습니다. 배트맨이 본능적으로 질서를 원하는 것처럼 조커는 본능적으로 혼돈을 원합니다. 배트맨이 고담 시에 질서를 세우면 조커가 무너뜨리고, 조커가 고담 시를 혼돈으로 몰아넣으면 배트맨이 다시 세웁니다.

이 영화는 슈퍼히어로가 악당을 쳐부수는 통쾌함을 선사하지는 못합니다. 이 영화에서 즐길 부분은 배트맨과 조커의 사회철학입니다. 각자 질서와 혼돈을 추구하는 두 사람은 각각 사회가 어떻게 질서를 유지하고 혼돈으로 물드는지를 보여줍니다. 그 사이에서 시민들은 질서와 혼란 사이에서 방황합니다. 체스판의 말들과 달리 각자의 의지를 지닌 시민들은 어디로 튈지 모르고, 그래서 관객들은 <다크 나이트>가 어떤 결말로 흘러갈지 짐작할 수 없습니다. 막이 내릴 때까지 땀을 쥐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승부는 결국 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둘의 승부가 아닙니다. <다크 나이트>는 배트맨의 존재의의를 탈바꿈합니다. <배트맨 비긴즈>에서는 아직 평범하게 악당을 때려잡고 감옥에 처넣는 자경단원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다크 나이트>는 배트맨이 진정으로 추구한 것이 보다 위대한 것임을 밝힙니다. 배트맨은 시민들에게 정의는 결코 패배하지 않는다는 희망을 안겨주고자 했습니다. 자경단 활동은 그것을 위한 수단에 불과했습니다. 그래서 자경단원으로서는 막을 수 없는 조커를 막기 위해서 배트맨은 그 동안 쌓아올린 모든 것을 희생합니다.

<다크 나이트>라는 제목 그대로 배트맨은 '다크 히어로'입니다. 태양 아래서 대중의 환호를 받는 빛의 영웅이 아닙니다. 목적을 위해서라면 범법자가 되는 것도 주저하지 않는 어둠 속의 영웅입니다. <다크 나이트>의 결말은 그런 '다크 히어로' 배트맨의 존재의의를 관객들에게 깨우쳐줍니다. 조커가 증명했듯이 사람들의 마음은 나약하고 쉽게 혼돈에 빠집니다. 그렇기에 항상 정의가 승리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아이러니하게도 정의가 이기기 위해서는 때로 정의를 어겨야 할 때도 있습니다. 배트맨은 그런 역할을 자청하는 사나이입니다. 그런 더러운 역할을 떠맡으면서도 결코 본래 가려던 길을 잃지 않는 배트맨의 마지막 모습이 감동적인 이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