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감상 이야기/크리스토퍼 놀란 시리즈 이야기

<배트맨 비긴즈> - 현실을 생각하고, 현실적으로 계획하고, 현실적으로 연출된 다크 히어로

오늘의박쥐 2019. 6. 1. 22:36

<배트맨 비긴즈>라는 제목은 '배트맨을 시작하다.'란 뜻입니다. 이 제목은 이것이 한 편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 영화를 시작으로 여러 편의 영화가 이어질 것을 시사합니다.

제목에 충실하게 <배트맨 비긴즈>는 '배트맨의 출현'이 어떤 것인지를 정성들여 묘사합니다. 배트맨이 활동하게 되는 고담 시는 범죄의 소굴입니다. 마피아들이 권력을 쥐고 있고, 시 정부와 경찰은 범죄를 해결할 능력이 없습니다. 이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서 백만장자 브루스 웨인은 배트맨이 되기로 합니다.

브루스의 목적은 단순한 범죄자 퇴치가 아닙니다. 진짜 목적은 고담 시를 개혁하는 겁니다. 근본적으로 범죄를 뿌리뽑고자 합니다. 이것은 뒷골목에서 범죄자들과 주먹다짐을 하는 것하고는 완전히 다른 문제입니다. 현실적으로 접근해야 하는 문제고, 치밀한 계획이 필요하며, 사회적인 조력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브루스는 무작정 슈트 입고 범죄자들에게 덤비는 대신 단계를 밟습니다. 우선 세상에 대해 배우기 위해서 기존 신분을 버리고 범죄자들의 세상을 유랑합니다. 싸우는 법도 익힙니다. 그리고 고담 시의 동향을 파악하고, 필요한 수단을 강구합니다. 법률에 묶여서 행동해서는 고담 시의 범죄를 뿌리뽑을 수 없다고 판단하여, 초법적인 자경활동의 필요성을 느낍니다. 그는 스스로 그 역할을 맡기로 하고, 집사 알프레드의 도움을 빌려 장비를 마련합니다. 그러나 자경활동 만으로는 사회를 개혁할 수 없으므로 경찰 내에서도 협력자를 찾습니다. 유일하게 청렴한 경찰 제임스 고든이 눈에 들어옵니다.

준비는 끝났습니다. 브루스 웨인은 장비를 장착하고 배트맨으로 데뷔합니다. 마피아 보스들을 잡아다가 제임스 고든에게 넘깁니다. 증거품도 함께 말입니다. 막대한 재산과 뛰어난 전투 기술, 수많은 첨단 장비, 철저한 지략을 등에 업은 배트맨 앞에서 일개 범죄자들은 상대가 되지 않습니다. 배트맨은 범죄자를 막는 영웅으로 떠오르고, 배트맨의 공적을 나누게 된 고든도 출세하게 됩니다. 이렇게 배트맨은 고담 시에서 범죄를 뿌리뽑을 첫 단계를 밟습니다.

<배트맨 비긴즈>는 사회적 관점에서 슈퍼히어로의 필요성을 논합니다. 법으로 해결할 수 없는 사태가 있다면, 초법적인 영웅이 필요할 수 있다는 논의를 전개합니다. 이로써 <배트맨 비긴즈>는 배트맨의 존재를 단순히 액션 영화의 주인공으로 끝내지 않고, 실제 현실에 필요할 수 있는 존재로 격상시켰습니다. 관객들은 영화 속의 고담 시를 자신들이 사는 현실과 겹쳐보고, 고담 시에 배트맨이 필요하듯이 현실에도 배트맨의 존재가 필요하지 않은지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그런 상상을 부추기기 위해서 <배트맨 비긴즈>는 영화의 내용을 최대한 현실성 있게 조성했습니다. 배트맨의 의상은 만화적인 느낌이 들지 않도록 진짜 갑옷처럼 만들어졌고, 탑승하는 차량도 진짜 무기로 쓸 수 있는 전투차량을 사용했습니다. 모든 것이 완벽하지는 않고, 최면 가스나 닌자 부대처럼 비현실적인 소재들도 등장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영화에 현실을 대입할 수 있을 정도는 됩니다.

하지만 슈퍼히어로 영화에 지나치게 현실을 대입시킨 탓에 모순도 생깁니다. 어쨌든 범죄를 소탕하겠다고 박쥐 코스튬을 입고 망토를 휘날리며 싸운다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작중에서는 '공포의 상징'이 필요해서 그랬다는 이유를 대는데, 현실적으로 보면 공포는커녕 웃음거리로 전락하지 않으면 다행입니다.

더욱 이상한 것은 브루스 웨인이 혼자서 싸운다는 점입니다. 고담 시는 넓고 범죄자들은 많으니, 여러 명을 고용해서 자경대를 만드는 것이 낫습니다. 브루스는 돈도 많고 장비를 대량 생산할 능력도 있으니 얼마든지 무장 세력을 만들 수 있습니다. 싸움은 그들에게 시키고 본인은 지휘만 하면 됩니다. 무책임해 보일지도 모르지만, 고담 시를 구원할 유일한 희망인 배트맨이 어느날 갑자기 범죄자에게 총 맞아 죽는 것보다는 훨씬 낫습니다.

덧붙이자면, 이는 원작의 캐릭터를 각색하는 과정에서 생긴 모순입니다. 원작의 배트맨은 사회 개혁 같은 커다란 비전을 가진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강도의 총에 부모를 잃은 탓에 범죄를 증오하게 되어, 밤마다 분노에 휩싸여 범죄자들에게 싸움을 거는 광전사였습니다. 그 분노 탓에 다른 영웅들하고도 쉽게 어울리지 못하고 항상 고독했던 다크 히어로입니다. 그런 광폭한 캐릭터를 이성적이고 냉철한 개혁가로 각색하면서 고독한 다크 히어로라는 점은 그대로 가져왔으니 모순이 발생한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