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 애니메이션 이야기

<신세기 에반게리온>이 명작일까...?

오늘의박쥐 2018. 12. 21. 21:52

네, 거기 에반게리온 팬분들, 일단 진정하시고 돌 던지지 마세요.


대놓고 말해서 저는 신세기 에반게리온이 명작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처음 봤을 때부터 명작이란 생각이 안 들었고, 지금까지 든 적이 없으며 앞으로도 없을 겁니다.




1995년 안도 히데아키와 사다모토 요시유키 등의 손으로 만들어진 TV 애니메이션 <신세기 에반게리온>은 일본 애니메이션 사상 최대의 화제를 일으키며 지금까지 명성을 떨치고 있습니다. 일본 애니메이션의 역사는 에반게리온 이전과 이후로 나뉩니다. 그 정도의 파급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럴 만도 합니다. 에반게리온은 거대 로봇에 탑승한 소년소녀들이 괴물과 싸운다는 단순한 스토리를 갖고 있지만, 인간의 내면을 적나라하게 파헤치는 연출과 각본, 리미티드 애니메이션에서 가능한 방법을 모조리 시도한 듯한 편집과 촬영, 로봇물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난폭하고 음험한 전개를 갖추고 있습니다. 그 독특한 작풍은 보는 사람 모두에게 충격을 주기 충분했고, 역사에 남을 만한 에너지를 갖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안노 히데아키를 비롯한 제작진의 역량은 확실히 뛰어납니다. 어쩌면 세계 역사상 최고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저는 에반게리온을 만든 사람들의 역량은 인정해도, 에반게리온 자체를 인정할 수가 없습니다. 이 애니는 전체적으로 난해하기 짝이 없습니다. 시청자를 혼란스럽게 하는 대화와 독백이 십 분 넘게 흐르는 일은 다반사고, 스토리와 아무 상관없는 영상이 플래시백처럼 화면을 뒤덮습니다. 한 마디로 도통 뜻을 알 수 없다는 겁니다. 저만의 지론이지만, 단번에 이해하기 어려운 작품은 좋은 작품이 아닙니다.


그 이상으로 각본이 너무 난잡합니다. 로봇을 타고 괴수와 싸우는 이야기인가 싶었더니, 뒤에 가면 괴수는 보기도 힘듭니다. 로봇도 안 나옵니다. 주인공들도 안 나옵니다. 조연들이 모여서 지들끼리만 알아들을 수 있는 철학이나 공상과학 같은 이야기를 십 분씩 떠들고 있습니다. 이 이해할 수 없는 24분짜리 영상을 몇 화씩이나 봐야 합니다. 다른 분들은 어떤지 몰라도요, 저는 빈말로도 흥미진진하다고 할 수 없었습니다. 지금도 애니를 재탕하더라도 그 부분은 빼고 봅니다.




무엇보다 결말이 너무나도 애매합니다. 24화 동안 신지는 거의 성장하지 않았습니다. 중반까지는 동료들과 힘을 합치고 아버지에게 인정받으면서 뭔가 배워나가는 것 같더니, 뒤에 가면 원점 회귀를 넘어서 아예 더 폐인이 되어 버립니다. 그 과정이 별로 납득가는 것도 아닙니다. 한 번 액체 속에 녹다가 다시 돌아오더니 갑자기 그렇게 됐다고 합니다. 액체 속에 녹는 것 자체가 상식의 범주를 벗어난 상황인데 설명은 더욱 상식을 벗어나서 이제 뭐가 뭔지 알 수 없습니다. 왠지 모르겠지만 우리 주인공은 찌질이가 되었다는 결말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진정한 결말이라는 극장판 <엔드 오브 에반게리온>은 한층 더 가관입니다. 찌질해진 주인공이 아무것도 안 하는 동안, 24화 동안 우리와 함께 했던 캐릭터들은 얼굴도 안 나오는 비밀 결사에게 몰살당합니다. 찌질해진 주인공이 기껏 다시 나갔지만 모든 것은 늦었습니다. 그 다음부터 하나도 이해할 수 없는 대사와 영상이 관객을 수십 분 동안 괴롭히더니 갑자기 끝. 무슨 내용인지 기억도 나지 않습니다.


도대체 이 애니의 포인트가 뭔가요? 저는 뭘 기대하면서 이 애니를 보면 되는 거죠?




기억나는 건 로봇이 무지하게 기괴하게 생겼다는 것하고, 무지하게 야한 장면이 많이 나온다는 거였습니다. 솔직히 그거 보려고 에반게리온을 봤네요. 아니었으면 안 봤을 듯...


그런 자극적인 장면을 보는 재미로는 충분히 볼 만한 애니였습니다. 하지만 이걸 가지고 인간의 심층의식이나 인류의 미래 같은 주제를 논할 만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다시 말하지만 애니의 기술적인 면에는 최정점에 달해 있습니다. 영상도, 각본도 말이에요. 하지만 이건 잎사귀만 푸르댕댕하고 줄기는 힘이 하나도 없는 갈대 같아요. 하나하나는 좋지만 전체 방향이 안 보입니다. 있기나 한 지 모르겠네요.


반면 <에반게리온 신극장판>은 매우 재밌게 봤습니다. 지금 제작 중인 <신 에반게리온 극장판:||>에서는 확실한 방향성을 보여주며 시리즈를 매듭짓기 바랍니다. 물론 나오기나 한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