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메리칸 뷰티> - 억눌린 욕망의 기폭제
<아메리칸 뷰티>는 최근 가장 인상 깊게 본 영화예요. 정상적인지 비정상적인지 모를 인간들이 모여서 옹기종기 살아가는 군상극입니다. ‘우와, 이 작자들 맛이 갔어...’라고 불쾌감을 느끼면서도, 과연 어떻게 될지 지켜보게 만드는 매력이 있어요.
제목인 ‘아메리칸 뷰티’는 미국의 미녀라는 뜻입니다. 무기력하게 살아가던 중년 남성 레스터 번햄은 어느날 딸의 친구를 보고 한눈에 반해 버립니다. 그리고 그녀의 맘에 들기 위해서 차차 변해가면서 삶이 바뀌게 되지요.
이렇게 쓰면 중년 남성과 미성년자 여성의 막장 불륜 관계가 중심 스토리 같나요? 하지만 아니랍니다. ‘딸의 친구’는 생각보다 영화에 많이 나오지 않아요. 주인공 레스터도 그렇게 딸의 친구를 열성적으로 쫓아다니지 않고요.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건 번햄 가족의 갈등입니다. 아내에게 쓸모없는 남편 취급 받으며 무기력하게 살아가는 레스터, 가정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는 상황에서 사업이 마음 먹은대로 돌아가지 않는 것에 스트레스를 받는 캐롤린, 성숙하지 못한 부모 밑에서 비뚤게 자라는 딸 제인. 이들의 갈등은 겉으로는 눈에 띄지 않지만, 피부 아래의 종기처럼 곪아가면서 이미 썩어가고 있었습니다. 터뜨리지 않고는 수습이 불가능할 정도로요.
딸의 친구는 계기에 지나지 않습니다. 레스터는 새로운 사랑을 찾으면서 더 이상 가족에게 속박되는 것을 거부합니다. 자신에게 반항하는 남편의 행동을 인정하지 못하는 캐롤린은 더욱 히스테릭해지면서 다른 남자와 불륜을 저지르고요. 부모의 갈등에 고래 싸움에 등 터지는 새우 꼴이 된 제인은 약간 위험한 느낌의 이웃 청년과 사랑에 빠지며 일탈을 시작합니다.
이 영화의 인물들은 다들 뭔가를 억누르며 살고 있습니다. 욕망을, 혹은 분노를 감추며 지금까지 살아왔죠. 영화가 다루는 부분은 그 억누른 감정이 참지 못하고 분출되기 시작하여 폭발할 때까지의 과정입니다. ‘아메리칸 뷰티’인 딸의 친구를 기폭제로요.
이야기만 놓고 보면 상당히 막장 스토리 같지만, 짜임새 있는 각본과 미장센, 그리고 배우들의 신들린 연기 덕분에 매우 몰입감 있는 영화입니다. 특히 신비한 이웃 청년 리키 역의 웨스 벤틀리의 연기는 진짜 정신질환이 있는 게 아닌지 의심케 하지요. 다른 배우들의 연기도 어느 하나 뒤지지 않고요. 무기력한 중년에서 자유를 만끽하는 쾌락주의자로 돌변하는 레스터의 모습을 연기하는 케빈 스페이시의 연기는 영화의 재미를 이끌어가는 원동력입니다.
각본도 좋지만 가장 훌륭한 것은 촬영이네요. 부산하면서도 어딘가 황량한 분위기는, 산만한 삶을 살면서도 내면은 공허한 등장인물들의 심리를 시각적으로 표현하지요. 레스터가 딸의 친구에게 반할 때, 다른 사람은 안 보이고 그녀 한 사람만 눈에 비치는 연출도 ‘아, 이 아저씨 홀딱 빠졌네.’라는 느낌을 주고요. 그밖에도 말 대신 화면으로 심리를 묘사하는 명장면이 한둘이 아니랍니다.
이 영화는 내면에 뭔가 억누르고 살아가는 분들에게 추천할 작품입니다. 현대 사회라면 그렇게 살고 있는 분이 많으시겠죠? 이 영화를 보고 자신이 억누른 욕망에 대해서 한번 돌아보시고, 다른 사람들의 억누른 욕망도 들여다 보시기 바랍니다. 당신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답을 내려주지는 않겠지만, 어째서 당신이 그렇게 억눌린 삶을 살아가야 하는지는 알려줄 것입니다. 당신이 특별히 불행한 것이 아니라 세상 누구나 각자의 억눌린 욕구를 안고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도 말이예요.
그리고... 음... 뭔가 뒤끝없게 멋진 말로 결론을 내리고 싳은데, 좀처럼 안 떠오르네요. 하지만 어쩌겠어요? 실제로 그런 영화인걸요. 아드레날린이 끌어오르는 화려한 드라마를 보고 싶은 분들에게는 비추입니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씁쓸한 영화거든요. 영화가 끝나고 뒷맛이 찜찜한 여운을 곱씹으며 사색에 잠기고 싶은 분들만 보시길 바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