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감상 이야기/21세기 영화 이야기

<판의 미로> - 신비스런 분위기, 혼란스럽고 답이 없는 결말

오늘의박쥐 2019. 7. 18. 14:29

스페인 내전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입니다. 군인과 재혼한 어머니를 따라 전선으로 오게 된 오필리아는 동화책을 좋아하는 소녀입니다. 그녀는 가족에게 아무 관심이 없는 아버지를 두려워합니다. 그러던 중에 오필리아는 미로에서 '판'과 만나 자신이 지하세계의 공중이며 시련을 통과해야 원래 세계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판의 미로>는 판타지 영화지만 모험 영화는 아닙니다. 오필리아는 대부분 시간을 무력하게 집 안에 갇혀 있습니다. 집 바로 밖에서는 정부군과 시민군의 치열한 게릴라 전이 펼쳐지고 있고, 집 안에서는 만삭의 어머니가 고통 속에 죽어갑니다. 아버지는 아들만을 원하며 딸에게 아무 관심을 보이지 않고, 아내 역시 아들을 낳기 위한 수단으로만 보고 있습니다. 오필리아는 기댈 곳 없는 집을 떠나 지하 세계로 가는 탐험에 매달립니다.

그러나 지하 세계로 가는 모험도 순탄치 않습니다. 오필리아는 '해리 포터'처럼 마법을 쓸 수도 없고, '프로도'처럼 든든한 동료나 마법의 반지도 없습니다. 그저 '판'이 알려주는 방법에 따라 시련을 통과할 뿐입니다. 그 과정에서 진흙탕을 기어가기도 하고, 식인괴물에게 잡아먹힐 뻔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규칙을 어겼다가 모든 것을 망칠 뻔하기도 했습니다. 그런 고행으로 가득한 길이지만 오필리아는 계속 도전합니다. 이 세계에는 희망이 없기에 지하세계로 가는 것만이 유일한 희망이기 때문입니다.

<판의 미로>의 매력은 고난으로 가득한 현실과, 그곳에서 벗어나기 위한 사람들의 몸부림입니다. 그것을 현실은 현실대로, 환상은 환상대로 세심한 촬영술과 조명 효과, 그리고 음악을 이용해 분위기를 살렸습니다. 특히 스토리의 흐름이 무뎌질 때마다 관객들의 시선을 잡아주는 음산한 음악이 흐르는 것이 인상적입니다. 이것 덕분에 2시간이 넘는 영화를 지루해지는 일 없이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분위기는 살렸어도 각본은 살리지 못했습니다. 첫째로 주인공인 오필리아에게 감정이입이 잘 되지 않습니다. 오필리아는 지하세계를 믿는 것 같기는 한데, 그런 동화 속 이야기를 믿을 정도로 순수한 아이로 보이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지하세계로 가는 일에 매우 적극적이지도 않습니다. 판이 재촉하면 그때서야 가는 수준입니다. 그리고 자기가 지하세계의 공주라고 믿고 있으면서도 현실 세계의 어머니도 진짜 어머니로 받아들이는 모순을 보입니다. 도통 뭘 하고 싶은 건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결말이 불친절합니다. 이 영화는 끝나기 직전까지만 해도 현실과 환상의 구분을 명확하게 긋고 있었습니다. 오필리아가 현실로부터 도망치고, 판의 인도에 따라 시련에 도전하는 순간에만 환상이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장면에서 갑자기 양쪽의 경계가 붕괴합니다. 어느 것이 현실이고 어느 것이 환상인지 알 수 없어지는 겁니다.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모호하게 하는 것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곡성>이나 <버닝> 등, 제가 좋아하는 영화들 중에도 그런 영화가 많습니다. 그러나 그런 영화들은 처음부터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모호하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관객들은 영화를 보는 내내 현실과 환상의 경계에 고민할 수 있었기에 결말에서 답을 주지 않아도 스스로 답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반면 <판의 미로>는 관객의 뒤통수를 치듯이 갑자기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무너뜨립니다.

그나마 오필리아의 체험이 전부 거짓이었다고 가정할 경우는 설명이 되는데, 진실이었다고 가정할 경우는 도통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지하세계는 대체 어떤 곳인지 아무 설명이 없으며, 판은 어떤 존재인지, 두꺼비와 식인 괴물은 무엇이었는지 아무 설명이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판'의 행동이 너무 오락가락해서 이해가 안 됩니다. 오필리아를 돕는다고 하면서 겉으로는 기분 나쁜 행동만 계속하고, 규칙을 어겨서는 안 된다고 그렇게 주의를 주더니 나중에는 갑자기 자기가 규칙을 깹니다. 이래서는 그냥 정신이 나간 놈으로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제목도 끝까지 이해가 안 됩니다. 저 미로의 이름이 '판의 미로'라면, 저 미로의 주인이 판이란 뜻일까요? 하지만 미로는 지하세계의 입구일 뿐이므로 굳이 주인이 없어도 됩니다. 주인이 있다면 지하세계의 왕일 겁니다. 그렇다면 판의 미로는 판이 있는 곳이란 뜻일까요? 하지만 판은 툭하면 미로 바깥으로 나옵니다. 무엇보다 영화에서 판은 그저 안내자일 뿐이지 어떤 주체적인 역할도 하지 않습니다. 제목부터 결말까지 하나도 이해가 안 되는 영화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