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감상 이야기/20세기 영화 이야기

<선셋 대로> - 자신에게 취한 인간은 주변을 상처입힌다

오늘의박쥐 2019. 6. 18. 19:56

<선셋 대로>는 1950년에 나온 고전영화입니다. 무성영화가 몰락하고 유성영화가 도래하던 시절, 무성영화 시대에 대배우였던 여자의 광기를 다룬 영화입니다. 영화 각본가인 주인공은 빚쟁이를 피해 도망다니다가 들린 선셋 대로의 저택에서 우연히 대배우를 만납니다. 대배우에게 각본을 써주겠다고 꼬드겨서 돈을 받아먹으려던 속셈이었습니다. 그러나 상식을 뛰어넘는 대배우의 광기에 휘말리며 주인공의 인생은 빚쟁이에게 쫓길 때보다 망가지게 됩니다.

여주인공 노마 데스몬드는 과거의 영광에 취해서 현재를 돌아보지 않는 인물입니다. 그녀는 과거에 자신을 알아줬던 사람들만 만나며, 새로운 만남을 갖지 않습니다. 이미 세상은 그녀를 잊어버렸지만, 그녀는 자신이 아직도 스타라고 생각합니다. 현실을 외면하기 위해서 모든 노력을 기울입니다. 집안에는 오직 자기의 전성기를 찍은 사진들만 가득합니다. 매일같이 자기 영화를 다시 돌아보며 자화자찬을 계속합니다. 새로운 영화들은 전부 볼품없다고 혹평합니다. 자기를 받아주지 않는 영화계를 인정하지 못해서 자기가 직접 각본을 쓰려고 합니다.

남주인공 조는 할리우드에서 성공하고 싶은 욕망과, 빚쟁이에게 쫓기는 생계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생계를 잠깐 해결할 목적으로 노마에게 접근했지만 일이 엉뚱하게 흘러갔습니다. 노마는 빚만이 아니라 모든 의식주를 다 해결해주는 대신에 자신의 현실도피에 조를 끌어들입니다. 조는 그녀의 현실도피에 참여하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었지만, 가혹한 현실에 도전하는 것에 더 염증이 나 있었습니다. 그는 노마를 떠날 용기를 내지 못합니다.

그러나 조는 자신의 각본을 응원해주는 여성 '베티'를 만나게 되어 다시 현실과 싸우게 됩니다. 그는 처음에 할리우드에 왔을 때 느꼈던 정열을 다시 느낍니다. 조는 결국 '선셋 대로'를 떠나 현실로 돌아갑니다. 영원히 자기만의 세계에 틀어박혀 현실을 외면하는 것보다는, 설령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더라도 현실에서 살아가는 것이 훨씬 보람 있는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행복하게 끝나면 좋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조는 이미 노마의 현실도피에 너무 깊게 관여하고 있었습니다. '선셋 대로'는 노마가 현실에서 도피하기 위해 만든 자신만의 안식처입니다. 그곳에 한번 들어왔던 인물이 도로 나간다는 사실은, 노마에게 다시 현실을 직시하게 하는 일이었습니다. 노마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안식처를 지키기 위해서 극단적인 선택을 합니다. 그 결과 영화는 파국을 맞이합니다.

노마 데스몬드라는 캐릭터가 좀 과장된 면은 있습니다. 공감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언동이 극단적이고, 배우의 연기도 연극 같이 화려합니다. 그렇지만 자기에게 취한 인간이 얼마나 무서운지 실감나게 해주는 인물입니다. 노마 데스몬드는 전적으로 자신을 찬양하는 것만을 원했고, 그것을 부정하는 것은 모조리 배제했습니다. 그 결과 그녀는 자신만의 환상에 빠져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변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녀와 얽히는 사람들은 앵무새처럼 그녀를 찬양하는 노예가 되거나, 그녀의 적이 되는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노마 데스몬드가 단순한 악인처럼 묘사되지는 않습니다. 그녀의 행동은 극단적이긴 하지만, 누구나 빠질 수 있는 유혹이기 때문입니다. 웬만한 사람들은 지금보다 훨씬 행복했거나 영광스러웠던 과거가 있습니다. 자신이 아직 그때의 행복을 누리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믿고 싶은 것은 당연한 소망입니다. 하지만 대개 그러지 못합니다. 보통 사람들은 현실을 외면하면서 살 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현실을 부정해서는 돈을 벌 수 없고, 사람들과 어울릴 수 없습니다. 노마 데스몬드는 그저 현실을 외면하면서 살 만한 재산이 있었고, 그녀의 영광스러운 과거만을 이야기해줄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었을 뿐입니다.

누구나 현실에서 도피하고 싶어합니다. 오직 자신만이 옳다고 믿고, 자신이 최고라고 믿으며, 그것을 부정하는 이들은 전부 무시하고 사는 것. 그것은 피하기 힘든 유혹입니다. 그렇게 살면 자신은 만족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주위 사람들에게는 끔찍한 상처를 줍니다. <선셋 대로>는 현실도피에 완전히 취한 노마라는 인물을 통해서 그것을 보여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