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국열차> - 개인이 저항하기에는 너무 거대한 사회, 그러나 변화는 찾아온다
생물이 살 수 없는 빙하 시대. 인류가 살 수 있는 유일한 거처는 '설국열차' 뿐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철저한 관리 하에서 살아가는 사회. 그 말단에 위치한 자들이 반항의 기치를 걸고 일어섭니다. 그들의 목표는 오직 하나, 모든 것을 지배하는 열차의 첫 칸입니다.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은 인류가 셸터 안에서 반목한다는 이야기는 흔한 소재입니다. 하지만 배경이 열차라는 것은 독창적입니다. 열차는 일자형의 선 모양입니다. 열차 안에는 갈림길이 없고, 계단도 없습니다. 길이 하나뿐입니다. 이러한 특성 탓에 주인공들은 영화 내내 극단적인 선택을 강요받습니다. 멈출 것인가, 나아갈 것인가.
또한 열차는 폐쇄적입니다. 문이 닫히면 다른 칸과 완전히 차단됩니다. 그래서 마지막 칸의 하층민들은 열차 전체에서 완벽하게 소외당합니다. 그저 문을 열 수 없다는 이유로 말입니다. 그것은 물리적인 것만이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차단된 것입니다. 그들은 문 너머의 세상과 전혀 교류하지 못합니다. 말 하나 주고받지 못하고, 무슨 일이 벌어지는 지도 모릅니다.
주인공들은 열차 마지막 칸에서 시작합니다. 이때까지는 마지막 칸이 그들 세상의 전부입니다. 영화의 플롯도 철저하게 주인공들의 시선에만 맞춰져 있고, 그래서 관객들도 처음에는 열차의 마지막 칸에 대해서만 압니다.
그리고 주인공들의 목표는 첫 번째 칸입니다. 그러나 열차 안에서 중간 칸을 뛰어넘어 첫 번째 칸으로 가는 것을 불가능합니다. 그 과정에서 주인공들은 열차의 모든 칸을 지나야 합니다. 그것은 현재 살아남은 인류의 모든 것을 둘러보고 지나가게 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관객들의 호기심은 목표 지점인 첫 번째 칸보다도, 중간에 지나야 하는 칸들의 모습에 쏠리게 됩니다.
마지막 칸에서 사람들은 잘 곳도 없고, 식량도 없고, 옷도 없었습니다. 오락도 없었고 씻을 수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칸의 사람들은 체계적인 시스템의 도움을 받으며 호화롭게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마지막 칸 사람들에게는 원수나 다름없는 열차장을 구세주로 섬기고 있었습니다. 풍족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 사이에서, 더럽고 초라한 주인공들의 행색은 더욱 두드러집니다.
이런 메울 수 없는 차이가 주인공들을 더욱 절망으로 몰아갑니다. 마지막 칸의 사람들은 건너편 칸의 사람들을 부러워했습니다. 그들은 더럽고 좁은 공간 대신에 풍족한 삶을 원했습니다. 그러나 풍족한 삶을 보내고 있는 사람들은 그들만의 완벽한 조화 속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식량 차량, 감옥 차량, 수도 차량, 교육 차량, 오락 차량 등으로 나뉘어져, 사령탑인 첫 번째 차량의 관리를 받으며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거지 소굴에서 막 기어나온 사람들이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첫 번째 차량이 가까워질 수록 양쪽의 격차는 뚜렷해지고, 여러 동료들을 희생하면서 주인공의 절망은 더욱 커집니다.
주인공이자 리더인 커티스는 자신의 행동에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아갑니다. 그에게는 여전히 두 가지 선택지밖에 없었고, 이제 와서 멈추는 것은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나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또다른 주인공 남궁민수는 나아가는 것에 아무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가 관심 있는 것은 밖이었습니다. 커티스는 자신이 열차의 시스템에 저항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 역시 열차에 속박된 인간이었습니다. 그는 멈추거나 나아갈 수밖에 없는 열차의 규칙을 따르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런 커티스가 열차 안에서 아무리 날뛰어봤자 열차 안에 변화를 가져올 수는 없었습니다. 반면 남궁민수는 열차 안에 없는 것을 보고 있었고, 그래서 진정한 의미에서 '변혁'을 몰고 옵니다.
<설국열차>는 봉준호 영화 역사의 분기점입니다. 이전까지 봉준호 감독의 영화에서는 개인을 돕지 않는 무능력한 사회와, 그 사회 앞에 무력한 개인의 절망만을 다뤘습니다. <설국열차>에서는 사회가 개인을 돕지 않는 이유가 무능력하기 때문이 아니라, 인류가 효과적으로 살아남기 위한 지혜임을 알려줍니다. 모든 것이 계획에 따라 움직이지 않으면 사회가 성립될 수 없으며, 소외된 일부를 위해서 전체의 질서를 무너뜨릴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설국열차'는 사회 질서의 양면성을 보여줍니다. 소외된 하층민들에게는 그저 자신들을 착취하는 절대악이지만, 나머지 사람들에게는 편안하고 안정적인 삶을 안겨주는 위대한 사회입니다.
영화는 그런 냉정한 진실을 전달하는 동시에 새로운 희망을 설파합니다. 그 사회가 절대적인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실은 얼마든지 변할 수 있습니다. 영화 속에서 설국열차가 생긴 지는 고작 17년밖에 안 됐습니다. 그 전에는 아무도 열차에서 살지 않았습니다. 앞으로도 얼마든지 새로운 삶의 형태가 등장할 수 있습니다. 남궁민수는 그것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결말은 역시 납득이 안 갑니다. 불행의 여신이 찾아오기라도 한 건지, 갑자기 온갖가지 불운이 겹치면서 마지막 3분 사이에 파국이 찾아옵니다. 이 갑작스럽고 작위적인 결말을 냉정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관객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뭐든 간에 박살나는 것을 좋아하는 사디스트가 아니라면, 그냥 넋이 나갈 수밖에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