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감상 이야기/봉준호 시리즈 이야기

<살인의 추억> - 두 형사가 싸운 상대는 범인이 아니라 '현실'이었다

오늘의박쥐 2019. 6. 8. 12:25

<살인의 추억>은 의문의 연쇄살인사건을 두 형사가 쫓는 이야기입니다. 한쪽은 육감에 의존하는 구시대적인 형사고, 한쪽은 과학 수사에 의존하는 신세대 형사입니다. 이 영화는 실제로 일어났던 '화성 연쇄살인 사건'을 모티브로 삼고 있습니다.

보통 범죄 스릴러라고 하면 살인마와 형사들의 치열한 두뇌 게임 같은 이미지가 있습니다. 하지만 <살인의 추억>은 그런 영화가 아닙니다. 이 영화에서 수사를 방해하는 것은 살인마의 교묘한 책략이 아니라, 80년대 당시의 한심한 현실입니다. 제대로 된 메뉴얼도 없고, 현장 보존조차 제대로 되지 않으며, 시위 진압에 경찰 인력이 투입되는 탓에 수사는 방치되고, 고문 같은 막장 수사가 판치고, 언론이 경찰 수사를 방해하고, DNA 검사 장비조차 없어서 외국에 의뢰를 해야 하는 참담한 현실 말입니다.

엉뚱하게도 이런 '답답한 현실'이 영화에 스릴을 안겨줍니다. 현실이 이렇게 답답하게 돌아가며 경찰들이 헛발질만 하는 동안, 진짜 범인은 밤거리를 활보하며 새로운 희생자를 늘려나갑니다. 언제쯤이면 이런 현실의 장벽을 뚫고 범인을 찾아낼 수 있을까. 그런 초조함을 안고 관객들은 스크린을 노려보게 됩니다.

이 영화에서 진정한 적은 '범인'이 아닙니다. '답답한 현실'입니다. 형사 드라마에 즐겨 보는 사람들은 일사분란한 수색과 최첨단 과학장비를 동한 과학수사를 꿈꾸지만, 현실은 그렇게 녹록하지 않습니다. 평범하게 증거품 하나 찾고 용의자 한 명 구속하는 것에도 여러 가지 사회적 압박이 따라옵니다. 형사는 그렇게 근사한 직업이 아닙니다.

지금껏 육감에 의지하며 오랜 세월을 형사로 살아온 박두만(송강호 분)은, 전대미문의 사건 앞에 자신의 방식이 통용되지 않는 현실을 인정합니다. 그리하여 신시대적인 형사 서태윤(김상경 분)의 방식이 옳다는 식의 각본으로 진행됩니다. 그러나 서태윤의 방식도 현실 앞에서 무력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마지막 터널 장면에서 밝혀진 충격적인 반전은 '현실'의 냉정함을 그대로 드러냅니다. 아무리 본인이 유능하고, 정의롭고, 열정적이어도, 현실이 따라주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냉혹한 진실 말입입니다.

이 영화는 통쾌한 영화는 아닙니다. 그러나 허무주의 영화도 아닙니다. 이 영화는 그저 담담하게 현실을 고합니다. 우리를 위협으로 몰아넣은 것은 스릴러 영화에 나오는 천재 살인마가 아니라, 답답한 사회와 냉혹한 현실입니다. <살인의 추억>은 형사들이 범인과 싸우는 영화가 아니라, 현실과 싸우는 영화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