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감상 이야기/미야자키 하야오 시리즈 이야기

<하울의 움직이는 성> - 강대한 마법사와 노쇠한 소녀가 함께 살아가는, 희대의 용두사미 영화

오늘의박쥐 2019. 6. 7. 20:31

한 소녀가 마법에 걸려 할머니가 됩니다. 늙어버린 소녀는 마을을 떠나고, 여행을 하다가 마법의 성을 발견합니다. 그곳은 마법사 하울의 집이었습니다. 늙은 소녀 소피는 움직이는 성 안에서 마법사 하울과 같이 살아갑니다.

하울의 성의 모양새는 매우 뒤죽박죽입니다. 관 옆에 발코니가 딸리고 동그란 지붕 옆에 기와 지붕이 딸렸습니다. 전봇대도 있고 배기구도 있고 장갑판도 있습니다. 굉장히 복잡하지만 하나도 정교하지 않습니다. 어린애들 여럿이 제멋대로 만든 공작품 같습니다. 그런 주제에 터무니없이 거대합니다. 이 거대하고 불안정한 건축물이 고작 네 개의 다리로 걸어갑니다. 이 기상천외한 건축물은 '마법의 성'이라는 것을 한눈에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마법이 아니면 있을 수 없는 성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거대한 크기와 비과학적인 형태는 성을 만든 하울이 얼마나 강력한 마법사인지 짐작하게 해 줍니다.

그런 위대한 마법사 하울은 정작 생활이 엉망입니다. 소피는 할머니로 변했지만 성실한 생활 태도는 바뀌지 않았습니다. 그녀의 존재는 성 안에서 큰 도움이 됩니다. 하울의 성 안에서 소피는 평범한 사람처럼 살아갈 수 있습니다.

어디로든 통하는 문, 불꽃의 악마 캘시퍼의 존재 등, 성은 가면 갈 수록 더욱 신비한 마법으로 관객들의 눈을 즐겁게 해 줍니다. 그 안에서 허약한 노파의 모습을 하고도 꿋꿋하게 살아가는 소피의 모습은 감동적입니다. 거기까지는 좋았지만, 그 다음부터 이야기를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하울의 스승 설리번이 등장하고, 그녀는 하울에게 왕국으로 돌아와 전쟁에 참여하라고 종용합니다. 소피는 하울이 강하고 상냥한 사람이라고 말하며 설리번에게 반대합니다. 근데 이 시점까지 소피는 하울과 몇 번 만나지도 않았으며, 하울보다는 그의 제자인 마르클과 더 많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왜 저렇게 기를 쓰고 하울을 변호하는 건지, 하울을 얼마나 잘 안다고 그의 성품을 논하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소피에게 걸린 저주의 효과가 너무 오락가락합니다. 저주에 걸려서 마을에서 살 수 없다고 도망쳤던 것이 이야기의 시발점이었습니다. 근데 별로 강력한 저주가 아니었는지 소피가 잠자고 있을 때나, 당당하게 소리치고 있을 때나, 들판으로 나가기만 해도 다시 원래대로 돌아오고는 합니다. 이러면 소피가 하울의 성에서 살아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고향에 있는 동생에게 돌아가야 마땅합니다.

소피가 하울과 같이 살면서 사랑에 빠지고, 저주가 풀린 다음에도 계속 하울을 지키며 살아간다는 이야기는 좋습니다. 정석적이고 매력적인 휴먼 드라마입니다. 그러나 중간 과정이 생략되면 안 됩니다. 관객들에게 하울이 어떤 캐릭터인지, 어째서 소피가 하울과 사랑에 빠지는지 충분히 이해할 시간을 줘야 합니다. 그리고 주인공을 속박하고 있는 저주의 효과는 명확해야 합니다. 가끔 가다 풀리기도 하고 안 풀리기도 한다는 식으로 하면 안 됩니다. 그래서는 저주 때문에 고통받는 주인공의 심리를 관객들이 이해할 수 없습니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 어째서 이런 초보적인 실수를 저지른 건지 모르겠습니다. 애니메이션 역사에 남을 만한 기발한 건축 미술이 부실한 각본으로 인해 낭비되고 말았습니다.